왜 암스테르담은
자유와 관용의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의 기원은 1100년경에 농부 수백 명이 해안에 흙으로
제방을 쌓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지리적, 사회적
조건들 덕분에 생각이나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협동할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기질이 정착되었다. ‘병립화[pillarisation] 혹은 네덜란드어로 ‘페르자윌링(verzuiling)’이라고 부르는 사회구조의 형성인 셈이다.이것은 1345년 ‘성체(聖體)의 기적’으로 암스테르담이 알려진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중세의 유럽에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은 기적은 오늘날 골드러시와 맞먹는 현상을 불러왔다.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의 병들고 아픈 자들이 찾아왔다. 도시로 꾸역꾸역
모여든 그들이 거쳐 온 순례 길은 ‘성스러운 길’로 알려지게
되었다.” [pp. 54~56]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의 주민들은 ‘다양성’을 찬양하고 참아주는 정책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관용’이었다.그 결과 암스테르담은
묘한 혼돈 속의 조화를 이루어갔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像) 조각 작업에
착수하고 코페르니쿠스가 본격적으로 천문학을 파고들기 시작했을 무렵 암스테르담은 활기찬 해상무역의 중심지이자 유럽에서 기독교적 신앙심이 가장 뜨거운
지역이었다. 말하자면, 이 도시는 생선 내장과 성당 향로, 배 바닥에 고인 오수, 타르, 똥, 시큼한 맥주의 냄새가 뒤섞여 진동하는 먼지투성이의 성스러운 곳, 비좁은
골목과 사선으로 내리는 빗줄기, 욕지거리 내뱉는 선원들과 신도들에게 돈 뜯어먹을 계략이나 꾸미는 수도원장이
한데 얽혀 살아가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p. 63]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은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의 특수한 상황이 원인이었다.네덜란드에서 “땅에 투자한 이들은 사회계층을 막론하고 거의 다 개인이었다. 유럽 다른 국가에서는 귀족이나 교회 아니면 귀족과 교회가 함께 땅을 소유하고 관리한 반면, 1500년경의 홀란트에서는 단 5퍼센트의 땅만 귀족이 소유했고 농민
소유의 땅이 무려 45퍼센트에 달했다. ~ 이러한
상황으로 보건대 당시 평범한 네덜란드인들은 다른 나라의 농노나 소작농들이 어쩔 수 없이 취한 순종적인 자세를 취할 마음이 성향적으로 덜했을 것이다.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사람들은 서로에게 지대를 지불하거나
부동산을 사고 팔았다. ~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다른 누군가를 섬겨야
하지만, 16세기의 네덜란드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자신들 외에 누구도 섬기지 않았다.” [pp. 74~75]2차 세계대전, 암스테르담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다.이 책은 저자가
자전거에 아들을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돈 다음 보모에게 아들을 맡기고 ‘프리다 멘코(Frieda Menco)’라는 연세 지긋한 유대인 할머니를 찾아가는 일화로 시작된다. 그리고 저자가 아들과 함께 그녀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왜 저자는 이런
수미상관(首尾相關)의 구성을 취했을까? 프리다 멘코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유대인 여성이다. 동시에 그녀는 <안네의 일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와는 한 동네에서 줄넘기를
하던 친구였다.따라서 <안네의 일기>와 더불어 프리다 멘코의 기억은 의미가 있다. 네덜란드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가족을, 또는 친구를 고발하거나
나치를 도운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유와 관용을 외치던 네덜란드인이 일제에 협조한 친일부역자처럼
행동한 것이다.저자에 따르면 여기에 네덜란드인의 구성에 따른 변수인 ‘페르자윌링(verzuiling)’도 작용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인은 종교에 따라 개신교도와 가톨릭 신자, 이념에
따라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들은 종교와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완고한 집단이다. 따라서 서로 융합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기 보다는
서로 개성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각각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을 배정하는 정책을 시도했고, 덕분에 나치의
유태인 적발이 더 용이했다는 것이다.그 결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유대인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현저히 낮은 생존율을 기록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유대인의 75퍼센트가 나치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은 반면, 네덜란드 유대인은
단 27퍼센트만이 살아남았다. ~ 네덜란드인들은, 본의 아니게 엄청나게 효율적으로, 조국의 자유주의 유산을 박멸하려는
나치의 조직적인 작업에 큰 도움을 주고 말았다” [p. 434] (단, Lucy Dawidowicz의 <The War Against the
Jews>, (Bantam, 1986)에 의하면 폴란드는 거주 유대인의 90%인 300여 만 명, 네덜란드는 거주 유대인의 75%인 10여 만 명이 사망했다.)반성과 부활.2차 세계대전
직후 네덜란드인들은 뼈아픈 반성의 시간을 가졌고,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이행했다.1946년, 암스테르담에서는 세계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 단체인 ‘셰익스피어 클럽’이 만들어졌고, 룰 판 다윈(Roel
van Duijn, 1943~)은 ‘프로보(provo) 운동’을 전개하며 1960년대 암스테르담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를 선도했다.이러한 노력 덕분에
암스테르담은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해 자유주의의 수도로
다시금 되살아났다. 물론 같은 ‘자유’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생각하는 정의는 다르다. 유럽에서는 공공의 영역에서 정부의 개입을 제한하는 것이 자유고, 미국에서는
사회적 대의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정부의 더 큰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 자유라고 보기 때문이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의 차이도 있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이 ‘자유’에 대해 그렇게 정의 짓게 한 것이 아닐까덕분에 오늘날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난민과 이주 노동자 문제에 대해 이 책은 또 하나의 대안을 던져주고 있다. 오래
동안, 미국과 다른 방식으로 다문화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암스테르담으로 대표되는 네덜란드의 시행착오는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지인 동시에 훌륭한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리라 생각한다.그럼 본론으로
돌아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가 된 암스테르담의 현재를 살펴보자.우선, 건물의 무단 점유가 허용되었다. “자기 소유가 아닌 곳에 무단으로 들어가 거주하는 것이 1년간 해당
건물이 비어 있었던 경우를 조건으로 1971년 합법화”[p.
27]된 것이다. 물론 2010년 법 개정으로
지금은 무단 점유가 불법이다.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매매가 합법인 도시이기도 하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연간 약 5천에서 7천5백
명의 허가 받은 성매매 여성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만약 너무 긴장해서 홍등가 여성에게 어떻게 일을 줄
수 있는지 감을 못 잡겠다면, 순찰 중인 경찰에 도움을 청하면 된다.” [p. 27]심지어 가벼운
식사와 음료를 파는 카페와 달리 커피숍에서는 커피와 함께 마리화나와 해시시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이처럼 마약류를 거래하는 것이 성매매처럼 합법인 것은 아니다. ‘헤도헌(gedogen)’, 즉 “엄밀히는 불법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용인되는” [p. 27] 네덜란드
특유의 범주의 적용을 받을 뿐이다. 어쩌면 미국 금주법(禁酒法)의 부작용을 보고,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금지하지 말고 통제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마약 중독자는
줄어들었지만 대마중독자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그 밖에도 미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유를 허용하는 정책이 많이 쏟아졌다.2001년 동성
결혼을 법제화하였으며,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치료 의무의 한계를 근거로
2002년 세계최초로 안락사/존엄사를 허용하였다.옥의 티p. 63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象) 조각 작업에 착수하고 ~ ⇒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像) 조각 작업에 착수하고 ~코끼리 상(象)에도 모양, 형상이라는
뜻은 있지만, 석상(石像),
동상(銅像), 흉상(胸像), 조각상(彫刻像)처럼, 모양/형상 상(像)으로 써야 한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자유’와 ‘관용’의 도시 암스테르담
중세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지식인들이 매료되었던 도시
암스테르담에 관한 한 편의 소설 같은 역사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암스테르담에 있는 ‘존애덤스연구소(John Adams Institute)’의 소장으로 일하면서 암스테르담에 깊이 매료된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러셀 쇼토는 이 책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 을 통해, 도시 곳곳을 누비면서 직접 수집한 역사적인 사건들과 이야기를 도시 풍경과 함께 경쾌한 문장으로 전한다. 암스테르담의 전 시장 요프 코헌, 안네 프랑크와 어린 시절 함께 뛰놀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프리다 멘코, 1960년대에 ‘프로보운동’을 이끌었던 룰 판 다윈 등 역사의 산 증인들과 나눈 인터뷰 내용들은 이 도시에서 화려하게 피어난 ‘자유’와 ‘관용’의 역사를 생생하게 구체화한다.
러셀 쇼토는 이 책에서, 유럽 변방의 암스테르담이 주민들의 협동을 통해 늪지와 갯벌을 개간해 도시를 건설했던 1100년경부터,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세워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17세기 황금기를 거쳐, 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항문화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세상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가 되기까지 근 천 년의 역사를 다룬다. 암스테르담은 또한, 근대 철학과 신학, 정치사상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스피노자가 그 혁신적인 사상을 탄생시킨 무대이기도 하며, 렘브란트가 종교화에서 탈피하여 캔버스 위에 ‘근대적 개인’을 표현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필력으로 한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한 이 책은 암스테르담이라는 작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유럽 전체의 역사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사상의 흐름까지 폭넓게 조망하는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또한 난민 문제와 이주 노동자 문제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 책은, 오래전부터 다문화 사회를 이루고 살아온 암스테르담이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적합한 다문화 정책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준다.
1부
1. 자전거 타고 동네 한 바퀴
2.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3. 대변혁
2부
4. 동인도회사
5. 자유주의가 꽃피다
6. 공화국에 사는 흔치 않은 행복
3부
7. 전 세계에 변화의 씨앗을 퍼뜨리다
8. 경제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의 공존
9. 나치 독일의 침공과 두 유대인 소녀
10. 마법이 일어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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