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너머로 둥그스름한 분홍색 반점이 보였다. 설사 우리를 집어 삼킬만큼 거대한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그 시작은 매번 분홍색 반점만큼 작은 신호에서 시작된다. 스코틀랜드에 사는 사촌언니가 전화를 했다. 한 달간 거기와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남편을 잃은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고 있을 그녀를 위한 언니의 배려였다. 남편을 잃고 나서 그녀는 자기가 집에서 내는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었다. 발 소리, 물 소리, 문 소리, 말소리, 생각의 소리. 그녀는 그것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되었다. 그것이 견딜 수 없어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그리고 분홍색 반점들이 점점 퍼져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이국의 쓸쓸함이 오히려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밤에 그녀는 처음으로 시리 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녀의 남편이 생전에 종종 장난을 하던 아이폰의 인공지능 기능이다. 처음에는 행복하다고 말해보고, 또 한번은 슬프다고 말해봤다. 시리는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라고 대답한다.다음 날 반점의 수가 더 늘어난 것을 보고 그녀는 병명을 찾아봤다. 장미색 비강진 .병의 치료법은 특별히 없고 삼개월에서 일년이 걸리면 낫는다고 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처럼.장미색 비강진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위에 별 이상이 없어 남들에게는 멀쩡해 보이는 병이었다. (p.240)옷으로 가린 부분에만 그 반점들이 생겨 난다는 점, 옷으로 가린다면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그녀의 처지를 표현하는 증상같았다. 이 작은 반점들처럼 슬픔이란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라고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위로 받고 싶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든 보여야 하는 상처들이었다. 에든버러에 살고 있는 대학 친구 현석을 만났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감추려 했지만 끝내 그가 더이상 그녀 곁에 없다는 사실을 감추지 못했다. 현석과 술을 마시고 그와 집으로 갔다. 현석과 키스를 하고 관계를 하려던 순간 스탠드를 잘못 건드려 불이 환하게 켜졌다. 그곳에는 그녀의 치부들이, 감추려 했지만 보여주고 싶었던, 보여주고 싶었지만 들키고 싶지 않았던 반점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상처를 마주한 두 사람은 거기에서 멈춰섰다. 둘은 다시 차를 마셨다. 현석이 묻는다. 그때 내가 만일 네 손을 안 놓았으면, 우린 지금 같이 있었을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그런 생각들을 접어두고 그녀는 일정을 서둘러 이튿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는 남편이 구하려다 목숨을 잃게 된 아이의 누나가 보낸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누군가가 슬픔은 남에게 보여져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맞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위로받아야 하는 것이냐고 한다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보여주는 것은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는 단순한 도식 이면에는, 슬픔을 가늠하지 못하면서 다 안다 며 하는 위로가 더 상처가 되는 역설적인 마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반점처럼 상처도 결국은 무뎌지는 때가 오고 말 것이다.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또 눈이 퍼붓고 할 것으로 믿는다- 황동규 시인 <즐거운 편지> 중
대한민국 네티즌이 ‘한국소설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로 선정한 김애란의 신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국내외 독자들을 위한 K-픽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갑작스런 사고로 남편을 잃은 명지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사촌 언니의 빈 집에서 한 달 간 머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007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Where Would You Like To Go?
099 창작노트 Writer’s Note
109 해설 Commentary
133 비평의 목소리 Critical Accla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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